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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답사 블로그

천주교, 기독교 초기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절두산순교성지&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답사기

by 그라운드호그 데이 2026. 1. 18.

 

천주교, 기독교가 조선 말기에 외국에서 들어온 만큼 우리나라의 천주교, 기독교의 역사는 조선말기 서양과의 역사와 연관이 많습니다. 이번에 다녀온 곳은 이런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천주교 절두산 순교성지, 양화진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다녀왔습니다. 위치는 합정역 7번 출구 방면에 있습니다.

 

 

합정역근방에 위치한 절두산순교성지와 선교사묘원

 

 

 

천주교 절두산순교성지

 

 

이 땅에 최초로 천주교회가 세워진 것은 1784년입니다. 그런데 조선에는 17세기 초반부터 '천주학'이 퍼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생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사제를 보내 달라고 교황청에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며 신부를 모셔 올 방법을 백방으로 찾았습니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1794년 최초로 중국 사제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고 1836년부터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들이 조선 땅에서 전교를 시작합니다.

 

천주교 박해는 신해박해(1791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에 걸쳐 이뤄졌습니다. 이 중 절두산(切頭山) 순교성지와 관련있는 사건은 병인박해입니다. 병인박해 때는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1814년-1866)를 포함 9명의 프랑스 사제와 8,000명의 천주교 신자가 순교하였습니다. 병인박해는 1866년부터 1871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병인박해는 프랑스 제국의 강화도 침공인 병인양요(1866년)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본래 절두산은 누에가 머리를 치켜든 것 같다고 하여 잠두봉으로 불렸는데 경치 좋은 한강의 명승지로 꼽혔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 8,000명이 참수형으로 순교하고 시신이 한강에 던져진 뒤 잠두봉 대신 '머리가 잘려진 산'이라는 뜻의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흉상

 

 

 

1984년에 이곳에 방문하였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흉상이 입구 근처에 있습니다.

 

 

 

절두산(切頭山) 글자가 새겨진 바위

 

 

 

절두산(切頭山)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었습니다. 이 옆길로 올라가면 한국천주교순교자 박물관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절두산은 짧은 옷을 입고 올라는 건 안된다고 합니다. 저는 개신교 신자로 여기에 방문했는데 천주교인이 아니라고 출입을 막지는 않습니다. 천주교에서 신성시 여기는 장소라는 걸 숙지하고 관람해야 합니다.

 

 

 

 

 

순교자를 상징하는 석상 조형물과 뒤에는 절두산과 근처 한강의 옛날 풍경 사진이 있습니다. 지금의 합정지역을 생각한다면 신기한 풍경입니다.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관람시간 19:30 ~ 17: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관람요금 자율적인 봉헌

 

절두산순교성지 내에 있는 박물관으로 천주교의 역사를 유품들과 전시를 볼 수 있습니다.

 

양화답설도

 

순교자박물관 내부에는 이런 양화진 근처의 옛날 풍경 그림도 있습니다.

 

 

 

조선후기 천주교 기도문이나 여러 유물들도 있었습니다.

 

 

김대건 신부 동상
김대건 신부 동상 안내문

 

 

 

 

밖으로 나오면 한국인 최초 로마 카톨릭교회 사제이자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1821년~1846년) 동상이 있었습니다. 바티칸 성당에도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있는데 갓을 쓴 모습이 케이팝 데몬헌터스의 사자보이스와 닮았다고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카톨릭 박해는 1791년 신해박해 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 총 5차례 걸쳐서 이뤄지는 만큼 그 이유도 시기마다 조금씩 달랐습니다. 1866년 생긴 병인박해는 서양(프랑스)에 대한 경계심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같은 시기 베트남은 프랑스에 의해 침략당하고 식민지화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은 복잡하지만 대략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 베트남에 17세기 즈음부터 카톨릭이 퍼짐
  • 베트남 교회가 베트남 정부에 의해 17~19세기에 걸쳐 여러차례 박해를 받음
  • 프랑스가 박해받는 카톨릭 신도를 보호하기 위해 1862년 베트남을 침공함 → 베트남의 프랑스 식민지화

 

천주교를 인정하고 박해를 멈추는 것이 해결책일수도 있었지만 당시 베트남이나 조선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베트남은 박해를 멈춘다고 프랑스가 침략을 안한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조선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병인양요 이후 침략은 없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 척화비가 세워지게 됩니다.

 

 

척화비

 

 

척화비는 1871년 전국 곳곳에 세워집니다. 조선 고종 때 문호 개방에 부정적이었던 흥선대원군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울 당시 워낙 많이 만들어졌기에 지금도 여러 곳에 남아있다고 합니다.

 

 

고종실록 1882년

(중략)
아! 어리석으면서 제멋대로 하는 것은 성인(聖人)이 경계한 바이고,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비방하면 왕법(王法)에 주벌하는 데 해당한다. 가르쳐주지도 않고 처형하는 것은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이 되므로 이와 같이 나열하여 명백히 유시한다. 그리고 이미 서양과 수호를 맺은 이상 서울과 지방에 세워놓은 척양에 관한 비문들은 시대가 달라졌으니 모두 뽑아버리도록 하라. 너희 사민들은 각기 이 뜻을 잘 알라.’는 내용으로 의정부로 하여금 게시하고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행회(行會)하게 하라."

 

 

이 비석들은 고종이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는 1882년에 고종이 뽑으라고 명하여 대부분 사라지게 됩니다. 이곳 절두산 순교성지에 있는 비석은 남아있는 척화비 중 하나입니다.

 

 

 

 

한불관계 요약

1866년 병인박해 조선에서 천주교를 박해한 사건
1866년 병인양요 병인박해에 대해 항의함을 명분으로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조선과 프랑스 제3공화국이 맺은 조약. 열강과 약소국이 맺은 전형적인 불평등조약으로 알려짐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프랑스인 선교사들의 활동도 제한적으로 허용받게 됩니다. 이후 1895년 병인박해 순교자 일부를 조선 정부가 사면하고 고종이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에게 유감을 표하고 친선을 제안하면서 한국 카톨릭은 사실상 해방되게 됩니다.

 

 

 

 

 

 

 

 

유적지 안내판

 

 

양화진외국인 선교사묘원과 절두산 순교성지 사이에는 이런 공터가 있습니다. 안내에 따라서 각 유적지를 방문할 수 있습니다.

 

 

잠두봉 유적지(출처:카카오맵)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방문절차

개방시간 내에 누구나 자율참배 가능

묘원 안내와 양화진홀 관람을 원하시면 방문 전날 오후 6시까지 예약신청(당일예약 불가)

 

개방 시간

월~토요일 오전 10시 ~ 오후 5시
단, 토요일의 경우 안전사고 예방과 참배 분위기 조성을 위해 오전10시부터 오후3시까지 안내예약자에 한해 묘원 출입이 가능합니다.

 

위치

합정역 7번 출구 방면

 

외국인선교사묘원을 글에서는 두번째로 소개하지만 방문할 때는 선교사묘원을 먼저 방문했습니다. 저는 머릿속에 미개한 조선에 의해서 희생당한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을 떠올리며 방문했지만 생각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우선, 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힌 선교사분들은 처형당하거나 순교하지는 않았습니다. 조선이라는 낯선 환경과 전염병. 일제의 간섭을 견뎌야 했지만 조선정부에서 박해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전에 천주교에서 파견 된 신부와는 여기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양화진선교사묘원은 개신교의 선교사 묘원인만큼 주로 미국, 영국 출신의 인물들이 묻혀 있습니다.

 

 

한미관계 요약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에서 군민의 화공으로 불타버린 사건
1871년 신미양요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항의와 조선의 강제 개항을 목적으로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선과 미합중국 사이에 체결된 수교 조약

 

 

 

대부분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에 활동하기 때문에 조선정부의 허락 아래에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주로 교육, 의료, 언론, 독립운동 등에 기여하면서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날 근처 100주년기념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날 설교에서 너대니얼 호손의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이라는 단편소설이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어니스트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제가 처음으로 소개하는 인물도 이름이 어니스트입니다. 참고로 현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역은 100주년기념교회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어니스트 베델(Ernest T. Bethell)(1872년~1909년, 향년 36세)

 

베델은 선교사는 아니지만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일제의 만행을 알리던 영국인 기자입니다. 영국 사우스웨스트 잉글랜드 브리스톨(Bristol) 출생으로 16세 때부터 일본 고베에서 거주하며 무역업에 종사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러일전쟁 관련 취재를 위해 입국하였지만 일제가 한국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습니다. 당시 체결되어 있던 영일동맹의 이점을 이용하여 일제에게 치외법권을 주장하며 신문사에 "개와 일본인은 출입을 금한다."라는 간판까지 달아 저항하였으나 일본 정부가 영국 정부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간청하여 제소까지 걸어 결국 벌금과 금고형을 선고받는데 금고 기간이 끝나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재판과정에서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1909년 5월 1일 한국에서 향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심근비대증으로 사망했으며 시신은 이곳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습니다.

 

1968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베델은 2025년 한국사 수능문제에서도 등장하였습니다.

 

2025년 대학수학능력시험 한국사영역

 

 

 

이곳에 묻힌 유명한 선교사 분들을 몇 분 더 소개해 보겠습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1859년~1916년, 향년 57세)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당시 한반도에서 활약한 영국 출신의 미국 선교사입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1대 총회장으로 대한민국 개신교 교단인 장로회의 아버지입니다. 양화진 선교사묘원에는 언더우드 부부를 비롯해 원한경 부부, 원일한 부부 등 4대에 걸쳐 7명이 안식하고 있습니다.

 

언더우드는 연세대학교 전신 중 하나인 연희전문학교와 경신학교의 설립자입니다. 또 다른 전신으로는 제중원(광혜원)이 있으며 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을 고용하여 설립하였습니다.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에는 언더우드 동상이 있습니다.

 

한국이름이 원두우(元杜尤)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등장합니다.

 

 

고종실록 1906년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미국인 언더우드〔元杜尤 : Underwood, Horace Grant〕 【언더우드】 는 우리나라에 오랫동안 주재한 공로가 있고, 영국 의사(醫師) 에브슨〔魚飛信 : Avison, Oliver R〕 【어비손】 은 여러 번 시술(試術)한 공이 있으니, 모두 특별히 4등에 서훈(敍勳)하고 각각 태극장(太極章)을 하사하라."

하였다.

 

 

언더우드가문은 여러 대에 걸쳐서 한국에서 활약합니다.

 

2대 - 호러스 호튼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한국명 원한경)

제암리 학살사건을 외신에 알리고 연희전문학교장 시절에는 한국어 학자들을 보호하기도 했습니다.

 

3대 -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Grant Underwood Jr. 한국명 원일한)

한국전쟁 당시에 유엔군으로 참전했습니다. 미션스쿨인 한남대학교와 배재대학교의 설립에 이바지합니다. 연세대 이사를 역임하였습니다.

 

4대 - 호러스 호튼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Horton Underwood Jr. 한국명 원한광)

5.18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해외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해 전두환 정부에 의해 강제 추방당하기도 했습니다. 5.18 당시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부교수였지만 5.18 당시 광주에 체류하였습니다.

 

 

 

 

 

 

호머 베절릴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년~1949년, 향년 86세)

 

미국 출신의 선교사이자 고종의 독립운동을 보좌한 대한민국의 외국인 출신 독립운동가입니다. 길모어(George W. Gilmore) 부부, 벙커(Dalzell A. Bunker) 부부와 함께 육영공원에 영어 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고종의 요청에 응해 국내에 들어왔습니다. 고종의 보좌, 자문 역할을 하며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 한 시도와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 작업이 유명합니다.

 

이외에도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표기에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 같은 서양식 표기를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공로로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금관 문화 훈장을 받게 되어 그의 증손자가 행사에 참석해서 훈장을 대신 받기도 했습니다.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1852년~1902년, 향년 44세)

 

미국의 감리회 선교사로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의 설립자입니다. 개교 이후 초기의 제자 중 한명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선교, 의료, 교육, 외교 등에서 활약한 인물들이 안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 중에는 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이나 올리버 R. 에비슨(Oliver R. Avison)처럼 우리나라에서 많은 역할을 했으나 본국에서 안식하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