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18 - [답사 블로그] - 성령대군사적지 대자암 답사기
이전 글에서 성령대군묘, 대자암 방문에 이어서 대자동에 있는 최영장군묘를 방문했습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는 해에 동생인 성령대군묘와 대자암에서 불사를 드린 기록이 있기 때문에 세종이 근처인 최영장군묘를 방문했을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저는 객관적인 자료는 없지만 왠지 방문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자세한 이유는 글을 쓰면서 더 다뤄보겠습니다.

최영장군묘는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지역에 있습니다. 이곳은 조선왕조실록에 성령대군의 묘지를 만들던 시점에는 고양현(高陽縣) 산리동(酸梨洞)으로 나오지만 대자암(大慈菴)이 지어진 것이 대자동(大慈洞)의 유래가 된 것 같습니다. 대자(大慈)의 한자 뜻은 '큰 자비', '부처가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큼' 입니다. 최영장군묘는 성령대군묘에 비하면 더 산속으로 들어가야 나옵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見金如石)" 를 인생의 지침으로 품고 살았던 최영 장군
아버지는 최원직이고 어머니는 봉산 지씨입니다. 최영은 본처 문화 류씨에게서 장남 최담, 차남 최언, 적녀 1명을 얻었고 첩인 은씨에게서 우왕의 아내가 되는 영비 최씨를 얻었습니다. 최영은 30대 중반이 되고 나서야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당시로는 상당히 늦은 나이였습니다.
1316년 출생, 본관:동주(철원)
1352년 조일신의 난 진압의 공으로 호군이 됨
1358년 황해도 오차포에 침입한 왜구 격파
1361년 홍건적에게 함락된 개성 수복
1373년 충청도 연산 개태사에 침입한 왜구 격퇴 철원부원군에 봉해짐
1388년 팔도도통사로서 요동 정벌 나섬, 위화도 회군
1388년 고양으로 유배. 다시 개성으로 유배.
1388년 개성에서 참수 당함
1397년 조선 태조 6년 시호를 무민(武愍)이라 함
관직에 오르고 나서는 고려말 최고의 명장다운 면모를 보여줍니다. 전투에 임할 시에 작전 수립과 정보 수집을 치밀하게 하고 복병이나 기습책도 자유롭게 구사합니다. 최영장군은 단순히 맹장이 아닌 전술적 사고를 겸비한 명장이었습니다. 조일신의 난 부터 공민왕 시절 수시로 출몰했던 왜구와 홍건적을 막아내며 수십년을 전장에서 살아남으며 전공을 세웁니다. 이후 조정에서 정치에 참여하고 재상까지 오르게 됩니다.
1388년 팔도도통사로 요동 정벌에 나서나 이성계 등이 위화도회군을 하고 그 해 유배당한 뒤 참수당하게 됩니다. 최영은 유언으로 "만약 내가 평생 동안 한 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실제로 최영의 묘에 풀이 나지 않아 그의 묘를 적분(赤墳)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최영의 묘로 가는 입구에는 이런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황금보기를 돌같이하라(見金如石)"는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이 사망하면서 최영에게 남긴 말이라고 합니다.

뒤에는 이런 약력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약력은 위에 글 쓰면서 적어 놓았습니다.
그러면 올라가기 전에 세종실록의 최영에 대한 평가를 살펴봅시다. 세종은 1397년생으로 최영이 죽은 뒤에 태어났지만 당시 조정에는 어린시절에 최영을 보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종실록 1430년
상참을 받고, 윤대를 행하고, 경연에 나아갔다.
......
"춘추관에서는 충신의 성명을 벌써 뽑아 보냈느냐."
......
"최 도통사(崔都統使) 는 공민왕 때에 있어 큰 공로가 있었다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순이 아뢰기를, "최영(崔瑩)이 군대를 거느리고 탐라를 정벌하였고, 현릉(玄陵, 공민왕)이 죽은 뒤에 왕씨(王氏)의 혈통이 아직 남아 있었는데도 당시의 재상은 영을 두려워하여 신우(辛禑)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영이 돌아와서 신우를 세운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었으나, 벌써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감히 바꾸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영은 의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대의를 들고 나와서 우(禑)를 쫓아내고 왕씨를 세웠으면 어떻겠는가."
하니, 순(循)이 대답하기를, "우가 벌써 서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뒤에는 또 요를 공격하는 일을 일으켰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색(李穡)도 여러 번 죄를 주기를 청하는 탄핵을 받았는데, 어찌하여 의리를 아는 학자로서 신씨(辛氏)에게 아부하였는가. ‘누구를 임금으로 세워야 되겠느냐. ’고 물었을 때, 그는 ‘선왕(先王)의 아들이 있다. ’고 하였으니, 우가 그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왕씨(王氏)를 세우지 않고 우를 세운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혹은 우리 태조(太祖)께서 일어나실 줄을 알고 일부러 우를 세운 것이 아니었을까." 하니,
순이 대답하기를, "태조께서 개국(開國)하신 것은 곧 회군(回軍)한 뒤의 일이요, 그 때에는 임금 노릇 하시려는 형적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면 어째서 우를 세웠을까. 왕씨의 직계 혈통으로는 누가 있었는가." 하니, 순이 아뢰기를, "직계 혈통에서는 후손이 없었고, 다만 공양왕(恭讓王)이 있었을 뿐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현릉(玄陵)은 어째서 신돈(辛旽)의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아서 임금의 자리에 세우고 왕씨의 혈통을 끊어버리려 하였을까. 옛적에, ‘차라리 다른 성을 세울지언정 같은 성은 세우지 않는다. ’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뜻과 마찬가지로다." 하니,
순이 아뢰기를, "이색(李穡)이 이르기를, ‘세상 사람이 나를 풍도(馮道)라고 하지만, 나는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사실이 바로 풍도(馮道)와 같다. 색(穡)은 진(晉)나라 때의 사실을 이끌어 말했으나, 진(晉)나라 때에는 북방의 오랑캐가 강성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었으니, 이것을 고려에 비교할 수는 없다."
최영은 세종의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에게 처형당했습니다. 그런데 세종이 충신을 가리는 경연에서 최영을 먼저 언급하는 걸 보면 최영을 고려의 충신으로 인정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실록에서는 고려의 우왕을 신우라고 표현하는데 요즘은 조선 건국세력이 조선 건국을 정당화 하기 위해 우왕을 신돈의 아들로 왜곡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세종시대 조정 사람들은 우왕을 신돈의 아들로 믿고 있던 것 같습니다.
세종실록 1434년
임금이 도승지 안숭선에게 이르기를,
"태종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최영(崔瑩)은 불학무술(不學無術)하나, 그의 지기(志氣)는 보통 사람과 다르다. ’고 하셨으니, 그의 자손 중에서 쓸 만한 사람을 기록하여 아뢰라."
하니, 숭선이 아뢰기를,
"최영은 신이 보지는 못하였사오나, 그의 마음은 나라뿐이요, 집안 일을 잊어버렸으니, 족히 취할 만하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고 하였다.
세종이 태종 이방원의 최영에 대한 평가를 언급하면서 최영의 자손 중 쓸 만한 사람을 보고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태종 이방원은 1383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고려시절 문신으로 재직하면서 당시 재상이었던 최영을 직접 보았을 것입니다. 최영은 무관(武官)출신이었지만 충직한 재상이었고 이방원은 당시 최영을 좋게 봤던 것 같습니다. 후에 태조 이성계가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릴만큼 이성계 일가가 최영에 대해서 한편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기록 이후에 최영의 자손이 관직에 오르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세종이 최영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성령대군 사찰인 대자암을 들렀다가 근처인 최영의 묘도 방문하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풀도 나지 않는다는데 궁금하기도 하고요.

올라가는 길은 이렇게 평범한 산길입니다. 산으로 꽤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계단이 보인다면 잘 찾아온 겁니다.


올라가기 전에 이런 안내문과 비석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계단을 오르면 최영장군묘가 나옵니다.


최영장군묘에 사람들이 헌화를 하고 갔습니다. 꽤 깊은 산속인데도 사람들이 꽤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뒤에 있는 묘는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의 묘입니다. 이미 고려도 망하고 조선도 망한 뒤인데다가 1976년에 인조적으로 풀은 심은 뒤 부터는 풀이 잘 자란다고 합니다.
참고로 흙을 두들겨 단단하게 만드는 식으로 무덤을 만들면 풀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최영의 유언과 적분(赤墳)에 관한 일화는 후세의 사람들이 창작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풀이 나고 안나고와 관계없이 최영장군은 국가를 위해서 헌신했으며 사사로운 욕심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오면 고양누리길 스탬프함이 있습니다. 살짝 숨겨져 있어서 스탬프투어 하시는 분들이 처음 오면 조금 헤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대자동 방문을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서울에 있는 집에 가려는데 고양이가 앞을 막길래 찍어봤습니다. 여러모로 기억에 많이 남는 대자동 답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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